[클래식] VI.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바이올린 협주곡 (오지희) :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 (2024)

- <봄>, <크로이처>, < D장조 협주곡>

베토벤이 젊었을 때부터 독보적인 피아니스트로 활동했고, 피아노 소나타와 피아노 협주곡 장르에서 탁월한 작곡 실력을 보인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9세 때 처음 바이올린을 배운 베토벤은 18세 때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 주자로 활동한 전적이 있다. 실력은 피아노에 미치지 못했어도 현악기를 애호하던 베토벤의 마음은 다양한 바이올린 소나타와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피아노가 어우러지는 실내악곡에서 빛을 발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는 작품의 양과 작곡 기간에서 피아노 소나타와 분명한 간극이 있다. 피아노 소나타는 평생에 걸쳐 32개의 곡이 창작됐지만 바이올린 소나타는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갈 무렵 10개의 작품이 나왔고, 이후 실내악 음색에서 발현되는 현악기 소리로 관심이 옮겨갔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중에서도 가장 애호되는 곡은 5번 <봄>, 9번 <크로이처>가 꼽힌다.

1801년 창작된 바이올린 소나타5번 (op.24)이 <봄>(Spring)이라 불린 것은 순전히 이 곡이 지닌 생동감 넘치는 울림 때문이다. 자연의 정서를 그린 베토벤 <전원> 교향곡이 F장조에 기초했듯이 <봄>도 F장조 위에서 밝고 경쾌한 느낌을 한껏 뿜어낸다. 특별히 1악장 첫 음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상쾌한 바이올린 선율은 대지가 깨어나 봄의 전령을 알리는 신호처럼 깔끔하고 신선하다. 또한 2악장의 느린 아다지오는 낭만의 들판에 온갖 꽃이 기지개를 켜며 솟아나는 듯 포근함이 가득하고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대화를 나누는 듯 다정하다. 반면 3악장은 1분가량 등장하는 매우 짧은 스케르초 악장으로 본격적으로 4악장으로 가기 전 유쾌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마지막 4악장은 1악장과 마찬가지로 생생한 선율의 흐름이 돋보이지만, 만물이 쭉쭉 뻗어나가는 것과 같은 힘이 넘치는 악장이다. 이러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은 베토벤이 직접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1악장 첫 소절을 듣는 순간 누구나 생생히 피어나는 봄을 연상시키는 상큼한 곡이다. 봄이 오면 언제나 더 다가오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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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표지

1803년 세상에 나온 바이올린 소나타9번(op.47)<크로이처>(Kreutzer)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의 변곡점이 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만 하더라도 피아노에 초점을 맞춰 움직이는 소나타라는 인상을 주는 데 반해, 베토벤 소나타 <크로이처>는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완전히 대등한 관계에서 음악이 진행된다. 거의 협주곡 풍으로 작곡한 소나타라고 적혀있던 원제목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협주곡처럼 경쟁하며 화려한 기상을 뽐낸다. 1803년 스케치를 시작해 1804년 초 나온 <영웅> 교향곡으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교향곡의 길을 제시했던 작곡가 입장에서도, 창작의 열정이 불타올랐던 시기에 나온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는 한 차원 높은 바이올린 소나타의 길로 올라설 수밖에 없는 곡이었다. 1악장을 시작하면서 Ab장조 위에 18마디에 걸쳐 느리게 진행하는 바이올린 부분은 특히 사색적이면서 한 번 들으면 잊을 수없는 인상을 준다. 도입부가 끝나고 바로 조성이 a단조로 바뀐 후 이어지는 빠른 프레스토 부분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두 악기는 동시에 격렬하게 움직인다. 리듬은 복잡하지 않지만 두 연주자의 마음과 실력이 일치하지 않으면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 정열적인 악장이다. 2악장은 특이하게도 주제와 4개의 변주로 구성됐다. 변주가 될 때마다 사랑스런 장식음 트릴과 발랄한 스타카토, 부드럽게 연결된 레가토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 세 특징이 모두 결합된 네 번째 변주는 그렇기에 지극히 낭만적으로 들린다. 마지막 3악장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는 다시 선율을 주고받으며 타란텔라 춤을 추듯 역동적인 음악을 펼쳐나간다.

한편 바이올린 소나타 9번이 <크로이처>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프랑스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루돌프 크로이처(Rodolphe Kreutzer 1766~1831)에게 헌정했기 때문이다. 크로이처 입장에서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찬란한 베토벤 작품 제목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됐으니 말이다. 원래 베토벤이 헌정하려던 바이올리니스트는 따로 있었다. 영국에서 활동하며 화려한 연주스타일을 자랑하던 바이올리니스트 브리지타워(George Bridgetower 1778–1860)가 그 주인공이었다. 베토벤이 헌정하고 싶어 했을 정도로 탁월한 기교를 자랑한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초연 후 갈등이 불거져 결별했다. 반면 바이올리니스트 크로이처는 베토벤이 <크로이처>를 출판하기 직전 잠시 만났는데 걸작을 헌정 받았다. 정작 본인은 곡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크로이처>가 이토록 화려하면서도 자유로운 예술성을 갖게 된 것은 브리지타워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기 때문이다. 제목은 크로이처에게 빼앗겼지만 브리지타워의 음악세계도 결국 작품에 남아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는 일부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을 부여했다. 톨스토이(1828~1910)는 1880년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를 출간했고 20세기 헝가리 작곡가 야나체크(Leoš Janáček 1854~1928)는 톨스토이 소설에 감흥을 받아 격정적이면서도 때로 구슬픈 현악사중주곡 1번 <크로이처 소나타>를 작곡했다. 톨스토이 소설 속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가 살인 사건의 단초가 된 것은 매우 흥미롭다.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내가 피아니스트와 베토벤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남편이 질투에 사로잡혀 아내를 살해했다고 고백하는 소설이다. 남편은 항변한다. <크로이처> 소나타 1악장의 그 빠른 프레스토가 어떤지 알고 있냐고. 실제로 1악장의 느린 도입부가 끝나고 격정적으로 움직이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이중주는 일체감 속에 격렬하게 흐른다. 열정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두 사람에게 도대체 왜 질투를 느낄까? 베토벤 <크로이처> 소나타는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가 마음을 완벽히 맞춰 연주해야 온전히 재현된다. 따라서 남편의 비정상적인 상상과 질투는 살인의 원인 제공자인 음악을 향해 더욱 가학적으로 흐른다. 음악은 영혼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닌 영혼을 자극해 파멸로 이끈다고. 살인과 질투, 음악이라는 극적 소재를 갖고 있는 톨스토이 소설은 또 다시 음악과 미술 작품을 탄생시키는 영감의 소재로 작용했다.

바이올린 협주곡D장조(op.61)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1803)과 마지막 10번(1812) 사이 1806년에 나온 곡이다. 창작력이 극대화된 중기 때 걸작이자 베토벤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협주곡이 나오기 전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 <열정>을 창작했고, 1806년에는 피아노 협주곡 4번, 교향곡 4번과 5번 <운명>을 작업하고 있었다. 얼마나 창작의 영감이 솟구치던 시기에 바이올린 협주곡을 구상했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는 음악이 장대하고 개성이 강하다. 깊이가 있으면서도 선율이 아름다워 애호가들의 사랑이 두텁다. 예컨대 1악장 시작에서 타악기 울림은 당당하고 파격적으로 다가오며 서정적인 2악장을 거쳐 등장하는 활기 찬 3악장의 역동적인 리듬 역시 힘차고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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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로이처 소나타, 프리네 그림(R. Prinet)(1901)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이 현재와 같은 인기와 가치를 얻기까지엔 우여곡절이 있었다. 초연은 베토벤 친구이자 당대 오스트리아의 재능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프란츠 클레멘트(Franz Clement 1780~1842)가 맡았다. 클레멘트는 매우 비상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아무리 복잡한 악보라도 잠깐 보고 외워서 연주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었다. 더구나 클레멘트의 연주 스타일은 강하고 힘이 넘치기보다 매우 섬세하고 우아했다. 1806년 12월 23일, 빈 극장에서 클레멘트가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할 당시 어떤 바이올리니스트도 할 수 없는 미션이 클레멘트에게 주어졌다. 직전에 곡이 완성됐기 때문에 연습을 하지 못하고 무대에 서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놀랍게도 클레멘트가 가진 특출한 능력 덕분에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악보를 보고 초견으로 연주한 무대가 관객에게 큰 감동을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30년 넘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이 최고의 바이올린 협주곡 레퍼토리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실력을 지닌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 1831~1907) 덕분이다. 요아힘에게도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는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절호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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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1868)

1844년 5월 27일, 멘델스존이 지휘하는 런던 필하모닉 협회(Philharmonic Society) 오케스트라가 13세 무렵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과 함께 무대에 섰다. 요아힘에게는 첫 런던 데뷔연주회였다. 사실 요아힘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 의견이 많아 런던 무대 데뷔에 난항을 겪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완성된 연주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요아힘은 베토벤 협주곡을 치밀하게 준비했기에 결국 성공적으로 데뷔 연주를 마칠 수 있었다. 더구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은 작곡가가 만든 카덴차가 없었다. 요아힘은 자신이 직접 작업한 카덴차를 포함해 전 곡을 외워서 연주했다.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의 탄생! 런던 데뷔 연주회의 청중이 요아힘의 연주에 얼마나 열렬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당시 비평가들과 멘델스존의 평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멘델스존은 오케스트라 앞에 선 요아힘에게 청중이 광적인 환호를 보냈다고 언급했다.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박수와 넘치는 환호소리! 요아힘의 완성도 높은 연주로 알려지지 않았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은 마침내 최고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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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_오지희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과 음악사를 전공한 후 백석문화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음악평론가와 클래식음악 전문해설가로 활동중이다. 클래식음악을 넘어 다양한 공연예술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2018년 출판한 평론집 <음악에 글을 새기다> 는 이러한 필자의 활동을 담은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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